소설, white tiger 15

자연사랑은 어린이들 희망입니다.

 

 

 

특별한 사건 없이 열흘이 지나갔다.

대지를 훅훅 달궜던 땡볕의 열기도 9월이 들어서면서 제풀에 꺾였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것이 가을이 다가왔음을 몸이 먼저 느꼈다.

머지않아 아름답게 물든 단풍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밤 10시경,

야자시간을 마친 대한고등학교 수험생들이 교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삼삼오오 몰려나오는 학생들 중에 김 선화도 끼어 있었다.

 

 

교문에서 10미터쯤 떨어진 가로등 옆,

승용차 한 대가 시동이 걸린 채 정차해 있었고 남학생들 몇 명이 차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염상철과 그 친구들이었다.

 

“상철아! 저기...”

“야, 너희들은 그만 가라!”

“간다. 잘해봐라!”

 

친구들을 쫓아 보낸 상철은 선화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선화는 평상시처럼 친구들과 얘기하며 다가왔다.

 

“김 선화!”

“상철이 너! 우리 기다렸니?”

“계순이 너는 좀 빠져라! 선화야, 얘기 좀 하자!”

 

한 여학생이 반갑게 나섰다가 무시만 당했다.

무시당한 여학생은 입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고, 선화는 못 들은 척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선화야, 할 얘기가...”

“난, 할 얘기 없는데...”

“야! 꼭 할 얘기가 있단 말이다. 잠깐이면 된다.”

“얘는 앞을 막고 그래, 비켜줄래!”

 

선화는 앞을 가로막는 상철을 피해가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다른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너희들 구경났냐? 빨리 집에 가서 잠들이나 자라!”

 

성질이 죽은 것도 아닐 텐데 상철은 언성을 높긴 했어도 말투는 많이 부드러웠다.

아마도 선화 앞이라서 그럴 것이었다.

어쨌든 상철은 선화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선화야! 나 말이다.”

“너 자꾸 이러면 화낸다.”

 

선화가 뒷걸음질을 치며 언성을 높였다.

 

염상철에겐 김 선화가 첫사랑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신입생들과 학부모들로 북적거리는 가운데 승용차 한 대가 교문 앞에 정차했다. 그때 사복을 입은 여학생이 차에서 내렸다. 고등학교 입학생답지 않게 늘씬한 몸매에 성숙한 모습인 여학생은 청순해 보이는 얼굴만큼이나 예뻤다. 이를 지켜본 상철은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사춘기이긴 했지만 난생처음 느낀 감정이었고 이유도 모른 채, ‘계집애, 괜찮은데...’ 라고 그때는 그렇게 치부하고 말았었다.

 

상철은 1학기 내내 1학년 대빵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바람에 선화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상철은 폭력을 휘두른 대가로 1학년 대빵이 되었고 학생들에게 멋짱이라 불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선도부 학생들이 등교하는 학생들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었다. 한 쪽에선 염상철이 친구들을 대동하여 왕따 학생들을 불러놓고 구박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한 대의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달려와 교문 앞에 멈춰 섰고, 차 문이 열리며 교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선화가 내려섰다. 이를 목격한 상철은 난생처음으로 느꼈던 입학식 날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꼈다.

 

그때부터 상철은 선화 주위를 맴돌며 환심을 사려는 동물의 본능적인 행동들을 종종 보였었다. 특히 다른 여학생들에게 대했던 과격한 행동이나 언행도 선화에겐 각별히 조심했다. 아마도 상철의 그런 행동들은 첫 느낌인 야릇한 감정에서 우러난 첫사랑의 표현일 것이었다. 하지만 선화는 상철을 학교 동기생 이상으론 상대하지 않았다.

 

“염상철!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새끼, 꼭 이럴 때...”

 

교문을 나서던 민혁과 철구가 달려왔다.

 

“선화야, 괜찮니...?”

“그럼, 새끼야, 누가 잡아먹기라도 했을까봐 그러냐? 아무튼 너라는 새끼 징글징글하다. 이젠 낯짝 볼일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있는 동안은 서로 얼굴 맞대지 말자, 그리고 말이다. 민혁이 너! 나중에 만나면 그땐 내가 당한 만큼 꼭 돌려준다. 잊지 마라! 알았냐? 강 민혁!”

 

느닷없이 나타난 민혁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 상철이었다.

하지만 선화는 민혁이 나타나자 백의청년이 나타난 것처럼 든든하고 좋았다.

 

“염상철! 알았으니, 그만 가라!”

“새끼, 선화야! 내일 보자.”

 

민혁이 가슴을 쭉 펴며 한발 나서자, 한차례 인상을 쓴 상철이 선화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차에 올라탔다.

 

“잘 가라!”

“강민혁! 항상 몸조심해라!”

 

상철이 차문 밖으로 주먹을 들어 보였고, 민혁이 씩 웃어 보였다.

 

상철은 선화에게 꼭 할 말이 있었다. 곧 일본으로 떠날 몸이라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할 말은 하고 가자고 큰 맘 먹고 기다렸던 상철이었다. 그런데 민혁이 나타나는 바람에 꼴만 우습게 되고 말았다. 성질대로라면 한바탕 난리를 쳤을 상철이지만 선화 앞이라 최대한 성질을 누그러뜨렸던 것이다.

 

민혁은 그동안 마도식의 불법 행위를 찾느라 학교 수업은 오전만 받았었다. 그러다 모처럼 만에 사건사고 뉴스를 들었다. 하나같이 분기를 일으킬만한 사건들이었다. 한 사건은 식당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 사람이 죽는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내용이었고, 또 한 사건은 남포동 번화가에서 이권을 놓고 벌어진 조직 간의 칼부림사건으로 선량한 시민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미성년자를 성 매매시킨 부부가 구속되는 등등의 사건도 있었다.

 

어쨌거나 마도식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에 대해 자신이 너무 집착한 것은 아닌지, 민혁은 자신을 돌아봤다. 사실은 할아버지 말씀처럼 대의를 위해선 사적인 감정은 버려야 옳았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충실 하는 것도 나뿐 것만은 아니라고 민혁은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건사고 뉴스를 들은 민혁은 정말이지 새삼 느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일이건 순리로 풀어야 탈이 없다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잠시나마 자신의 본분을 잊은 것에 대해 민혁은 반성했다.

 

야자시간이 끝나갈 무렵에 민혁은 학교에 왔다. 나름대로는 야간순찰을 돌듯 다니다 보면 뭔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 시간쯤 사상터미널 근처를 배회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나설 만한 특별한 일은 없었다. 민혁은 이왕 나온 것 철구나 만나 볼 생각에 학교에 온 것이었다. 그 바람에 상철이가 졸업 전에 학교를 떠날 것이란 예감을 받았고, 뜻하지 않게 선화와 데이트까지 했다.

 

 

시간은 23시가 지나고 있었다.

서면 복개도로변은 야경이 현란한 가운데 막차를 타려는 행인들과 유흥에 빠진 사람들로 부산했다. 특히 2차, 3차를 가겠다고 고성방가를 터트리며 흥청거리는 사람들은 보기에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또한 차도를 제집 안마당을 걷듯 휘청거리며 건너는 취객들과 무섭게 질주하는 차량들로 도로는 그야말로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손님을 기다리는 영업용택시들 사이에 이방인처럼 정차해 있는 검정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차안엔 남녀가 피곤을 쫓으려는 듯 자판기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면서도 지나가는 행인들을 유심히 살폈다. 특히 그들의 눈길이 예리하게 주시한 곳은 건너편 성인오락실이었다.

 

“들어가서 확인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요. 그런데 정보는 확실한 건가요?”

“검사님! 열 번도 더 물으셨습니다.”

“그랬군요. 내가 조급증이 생겼나 봐요.”

“그동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럴 겁니다.”

“오늘은 무슨 수를 내서라도 놈들을 잡아야 할 텐데...”

 

영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커피를 마신다고 피로와 잠이 달아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란은 자꾸 내리 감기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마지막 한 방울이라도 아깝다는 듯 혀를 날름거려 한 방울씩 떨어지는 커피를 받아먹었다. 이를 지켜보던 권 철권이 웃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내보인 영란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권철권의 눈엔 검사가 아닌 순수하고 장난기 있는 아가씨로 보였던 것이다.

“......”

 

“검사님! 안되겠습니다. 이만 들이칩시다.”

“알았어요. 가죠.”

 

영란은 멋쩍은 듯 컵을 얼른 내려놓곤 차 문을 열곤 밖으로 나왔다.

소매를 걷어 올린 점퍼에 검정바지 차림인 영란은 앞서서 차도를 건넜다.

그 뒤를 권철권이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

 

바로 그때였다. 언제 서면에 왔는지 청바지에 남방차림인 민혁이 오락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철구와 친구들이 자리를 비켜주는 바람에 선화와 데이트를 한 민혁이 무슨 일인지 서면에 나타난 것이다. 학교에서 300미터 거리인 차도까지 나란히 걸어 내려온 것이 데이트라면 데이트였다. 차도에 도착하자 선화 아버지가 승용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 처음으로 선화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아니 만나기는 두 번째지만 선화 아버지와 얘길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선화가 민혁의 얘기를 했는지, 선화에게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반가워 하셨다.

 

민혁은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밤 풍경을 구경하며 서면까지 왔다.

특별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 서면에 온 것은 아니었다.

우범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계속

 

^(^,

11월 1일입니다.

모두들 뜻하는 소망 이루시기 바랍니다. 

 

^(^,

자연사랑은

어린이들 미래이자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