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곳간

 이사부(異斯夫)는 신라 장군

듬직한 남자 2024. 6. 15.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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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2, 신라장군 이사부

3, 울릉도와 독도

4, 문제 이야기

5, 결론

 

 

이사부(異斯夫)는 신라 장군

 

이사부 장군은

신라지증왕 이래 법흥왕, 진흥왕 때까지 활약한 신라의 대표적인 장군이며 중신이다 

505년(지증왕 6) 신라에서는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悉直州)가 설치되었다. 
이때 이사부는 그곳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그리고 512년에는 우산국( 지금의 울릉도)을 점령하였다. 

원래 우산국은 지리적인 이유로 신라에 귀복 하지 않고 있었으며,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사부는 계교로써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獅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가득 싣고

그 나라 해안을 내왕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니,

그들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541년(진흥왕 2)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당시 병부령은 단순한 병부의 책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등·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 요직의 하나였다. 

그 뒤, 562년(진흥왕 23)까지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545년 왕에게 국사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왕은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국사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함락하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점령하는 등 양국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틈을 타, 이사부는 이 두 곳을 공략하여 점령한 뒤,

성을 증축하고 1,000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어 금현성 탈환을 위해 재차 침입한 고구려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단양 신라 적성비 (丹陽新羅赤城碑)에 의하면, 

549년(진흥왕 10) 전후에 이찬 이사부는 파진찬두미(豆彌)와 

아찬 비 차부 (比次夫) 무력(武力 : 김유신의 할아버지)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 지방을 경략하여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

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때에 사다함(斯多含) 이 5,000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旃檀門)에 치달아 백기를 세우니 

성중(成中)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본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이후, 이사부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 위는 백과에서 발췌 -

 

- 아래는 중앙일보에서 발췌 -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는 지장(智將)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거친 반역의 섬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간단한 계략으로 정복했다.

512년 그는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섬에 도착했다.

사자 조각을 해안 쪽으로 세운 뒤 유황불을 피워

마치 사자의 입에서 화염이 내뿜어지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북과 나각으로 굉음을 쏟아냈다.

이어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섬에 풀어 모두 밟히고 물려 죽게 하겠다"라고

협박, 진짜로 항 복을 받아냈다.

울릉도 남양 포구에 서 있는 사자바위가 그 물증이란 전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우산국은 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의 땅으로 자동 상속됐지만

사실은 한민족 유민과 왜구( 倭寇)들이 뒤엉켜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반복하며 살았다.

조선 초 대마도의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옮겨 살게 해달라고 청원해 왔으나

태종이 거절했다는 기록을 보면 소유권은 엄연히 조선왕실에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왜구들에 의한 피해가 끊이지 않자 울릉도에서

조선 사람을 모두 철수시키는 공도(空島. 섬을 비움) 정책을 택했다.

소유권자가 방치한 가운데

울릉도는 여전히 조선의 유민과 왜구가 다투는 분쟁의 섬으로 남았다.

조선왕실이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한 것은 왕조 말기인 1882년.

울릉도 내 조선인 마을이 불타는 등 피해가 잇따르자

고종이 검찰사 이규원을 파견했다.

검찰 사는 울릉도 내 일본인과 면담하면서

이들이 울릉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믿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대일본국 송도(松島)'라 적힌 표목(標木)이었다.

메이지(明治) 2년(1869년)에 세워졌으니

무려 13년간 울릉도가 일본땅으로 둔갑했던 셈이다.

검찰 사는 높이 2m, 폭 30㎝ 크기의 푯말을 찍어내 태운 뒤

남은 재를 바구니에 담아 돌과 함께 깊은 바다에 던져버렸다.

조선왕실의 항의로 다음 해 일본인들은 모두 섬을 떠났다.

푸른 바다에 솟은 화산섬 울릉도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우리 땅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희귀 동. 식물을 안고 살아가는 기암절벽의 비경은 여전하다.

환경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묶어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키로 한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일본 외무성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항의한다는 소식이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이사부 장군이 지하에서 웃는다.

 

 

***

 

일본은 아직도 반성할 줄 모른다.

언젠가 반드시 백배 용서를 구하게 될 것이다.

창작 자료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

열심히 산다는 것은 행복을 심는 일이다.

가족사랑이 행복이다.

긍정의 삶으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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